Risk & Return
2506 US CPI Preview 이번 6월 CPI는 4월 관세영향이 가시화되기 시작할 수 있고, 구체적으로 Core Goods 수치가 어떻게 나오는지가 중요. 구체적으로 4월 초에 발효된 관세가 (1) 선적까지 걸리는 기간이 약 1달 정도고 (2) 관세청이 대부분의 수입업자들에게 관세 지불을 1.5개월 유예할 수 있도록 허용하며 (3) front-loading과 재고가 가격 유지에 도움이 되기에 데이터에 영향을 끼치는데에는 더 시간이 걸릴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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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정보는 많이 퍼져야 그 부가가치가 올라간다고 생각
한국에서는 이러한 정보의 가치를 많이 낮게 보는 경향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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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UMP: CRYPTO HAS GONE UP MORE THAN ANY STOCK. CRYPTO MAKES THE DOLLAR LOOK GOOD. CRYPTO IS GOOD FOR THE DOLLAR, THE NATION
Forwarded from 선수촌
이번 사건을 제대로 다루는 언론사는 많지 않습니다.
17일 현재까지 서울신문, 한겨레, 이데일리, 미디어오늘 등 소수 매체만 기자 선행매매 수사를 다뤘습니다.
금융감독원의 한 관계자는 "
대부분의 금감원 사람이 이번 사태의 심각성이나 부도덕성에 비하여 언론 보도가 매우 안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라고 말했습니다.
동업자라는 이유로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카르텔 없는 곳은 없다.
언론사도 카르텔이 있겠지만 카르텔중 으뜸은 여의도 카르텔이제.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56/0011992183
Naver
주식으로 1년에 5억…그 ‘기자’들이 사는 세상
금융당국이 일부 기자들을 '털고' 있습니다. 기자 본인과 가족, 지인의 주식 계좌를 '탈탈' 털고 있습니다. 금융위원회, 금융감독원 그리고 검찰까지 나섰습니다. 속칭 '꾼'을 터는 건 흔한 일입니다. 주식으로 해 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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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warded from Rafiki research
주말 칼럼 “관세가 스테이블코인에 미치는 영향”
트럼프 관세의 풍선 효과는 이상하게 크립토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관세가 상승하면서 국경간 무역 비용이 증가하고 있는데, 결제 비용이라도 아껴보자는 한계 수요가 생기고 있습니다.
https://rafikiresearch.blogspot.com/
트럼프 관세의 풍선 효과는 이상하게 크립토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관세가 상승하면서 국경간 무역 비용이 증가하고 있는데, 결제 비용이라도 아껴보자는 한계 수요가 생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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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spot
Rafiki Research
글로벌 매크로와 한국 주식 투자 관련 정보, 데이터, 분석을 제공하는 리서치입니다.
Forwarded from 하나 중국/신흥국 전략 김경환
•잭 도시(Jack Dorsey)의 핀테크 기업 Block이 오는 7월 23일 S&P500 지수에 편입될 예정임. 이는 디지털 결제 및 암호화폐가 기존 금융 시스템 내에서 점점 더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됨.
•반면, 로빈후드(Robinhood)는 이번에도 세 번째 연속 탈락, Block의 시가총액은 435억 달러로, 로빈후드(약 1,000억 달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함.
•편입 소식 발표 직후 Block의 주가는 장외거래에서 한때 14% 급등, 이후 8.49% 상승으로 마감됨.
>Jack Dorsey的金融科技公司Block将于7月23日加入标普500指数,突显了数字支付和加密货币在主流金融中的影响力日益增强。而对于Robinhood,这已是其连续第三次落选,Block市值为435亿美元,远低于Robinhood近1000亿美元的市值。消息公布后,Block股价在盘后交易中一度飙升14%,随后涨幅回落至8.49%。
•반면, 로빈후드(Robinhood)는 이번에도 세 번째 연속 탈락, Block의 시가총액은 435억 달러로, 로빈후드(약 1,000억 달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함.
•편입 소식 발표 직후 Block의 주가는 장외거래에서 한때 14% 급등, 이후 8.49% 상승으로 마감됨.
>Jack Dorsey的金融科技公司Block将于7月23日加入标普500指数,突显了数字支付和加密货币在主流金融中的影响力日益增强。而对于Robinhood,这已是其连续第三次落选,Block市值为435亿美元,远低于Robinhood近1000亿美元的市值。消息公布后,Block股价在盘后交易中一度飙升14%,随后涨幅回落至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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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warded from Narrative Wars
Media is too b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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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Goldman Sachs" 그들은 어떻게 역사적으로 세계를 지배해왔는가? (Source: Golmdan Sachs, FINAiUS, and other published analyses)
1. 1886~1914: 골드만삭스의 태동과 상업어음 비즈니스
1886년, 의류 사업으로 작은 성공을 거둔 유대인 이민자 마커스 골드만은 금융업에 발을 들인다. 그는 소규모 기업들이 매출채권을 빠르게 현금화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간파했다. 당시 은행 대출은 받기 어려웠고, 그는 이들 기업의 단기채권을 할인된 가격에 매입한 뒤 더 높은 가격에 다른 투자자나 은행에 재판매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단기 대출이 훗날 '상업어음'으로 불리게 된다. 이때가 바로 투자은행 산업의 태동기였다. 상업은행이 보수적이고 안전한 자금을 제공하는 것과 달리, Goldman Sachs 같은 회사는 더 위험한 자금을 제공했다. 그래서 '투자은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10년 후, 마커스 골드만은 연간 약 3천만 달러 규모의 상업어음을 거래하는 수준까지 사업을 키워낸다. 그가 60세가 되었을 때는 이미 평균 수명을 넘긴 상태였다. 은퇴 후에도 가업이 번창하도록 하기 위해 그는 사위 사무엘 삭스를 파트너로 영입한다. 1896년, 삭스는 회사의 자본금을 5명의 파트너에게 분배되는 160만 달러 수준까지 키워낸다. 하지만 상업어음 발행과 거래 시장은 빠르게 포화 상태에 이르고 있었다. 회사를 더 키우기 위해선 다음 성장 동력을 찾아야 했다.
2. 1897~1914: IPO 사업 진출과 리먼 브라더스와의 협업
19세기 말, 기업들은 상장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는 시대에 접어들고 있었다. 당신이 비상장 회사라면, 즉 친구 몇 명과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가 상장하고 싶어질 때, 일반적으로는 투자은행에 찾아간다. 투자은행은 발행과정을 설계하고, 언더라이팅을 해준다. 당시 IPO는 유럽계 명문 투자은행들이 주도하던 엘리트 비즈니스였다. 유대계였던 골드만삭스는 이 업계의 '아웃사이더'였지만, 이 파트너십은 IPO 비즈니스에 진출하기로 결심한다. 시작은 유대계 기업을 상장시키는 것.
1897년, Sears의 순자산은 25만 달러였지만 1905년에는 매출 3,700만 달러, 순이익 280만 달러를 기록하며 IPO 후보로 급부상한다. 하지만 시어스를 상장시키는 건 골드만삭스 단독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또 다른 유대계 신흥 투자은행인 리먼 브라더스와 손을 잡는다. 둘은 시어스의 보통주 3천만 달러, 우선주 1천만 달러 규모를 인수한다. 이 딜을 통해 두 회사는 전례 없는 수수료를 벌어들인다. 이후 다수의 기업들이 골드만삭스를 고객으로 삼게 되면서, 1914년에는 월가에서 유력한 투자은행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당시 시니어 파트너였던 헨리 골드만은 미 연방준비제도 설계자로 초청될 정도였다. 하지만 IPO는 경기순환형 비즈니스였다. 주식과 채권 발행으로 수백만 달러를 벌어들인 후, 골드만삭스는 이제 이 자금을 어떻게 재투자할지 고민하게 된다.
3. 1920~1929: 로어링 20스, 투자신탁 열풍, 그리고 대공황
마침내, 완벽한 타이밍이 온다. 1920년대 미국은 역사상 가장 강력한 강세장이 펼쳐지는 '로어링 20스' 시기였다. 사람들은 경제적 낙원이 도래했다고 믿었다. 은행 대출도 손쉽게 받을 수 있었고, 모두가 낙관에 휩싸였다. 골드만삭스는 이런 상황을 절호의 기회로 보고 본격적으로 투기 시장에 뛰어든다. 1백만 달러의 자본으로 'Trading Corporation'을 설립한 후, 이를 일반 대중에게 10배 가격에 판매하며 총 9,300만 달러를 조달한다. 이는 오늘날의 '스팩'과 매우 유사한 구조다. 본질적으로는 본인의 돈을 거의 쓰지 않고 시장에서 엄청난 자금을 모으는 방식이었다. 이후 투자신탁을 계속해서 만들어내고, 시장은 이 신탁을 사들이며 호황은 지속된다.
하지만 모든 호황은 끝나기 마련이다. 1929년 10월 29일. 역사상 최악의 금융 붕괴가 발생한다. 미국의 실업률이 폭증하고, 결혼률은 22% 하락, 자살률은 40% 상승한다. 골드만삭스의 트레이딩 코퍼레이션은 거의 전멸한다. 수억 달러가 증발했고, 파트너십은 1,300만 달러를 손실로 기록한다. 수백 개의 투자신탁이 파산하며 투자자들과 은행들을 끌어내린다. 그 와중에도 골드만삭스는 살아남는다. 고객들이 회사를 떠나지 않은 건 오직 한 남자 덕분이었다.
4.1930~1956: 시드니 와인버그, 바닥에서 정점으로
시드니 와인버그는 브루클린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11남매 중 셋째였다. 고등학교도 중퇴하고 가족을 부양해야 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그는 뛰어난 근면성과 인간관계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는 골드만삭스에서 청소부로 시작해 단 15년 만에 최고경영자 자리에까지 오른다. 정치인, CEO, 고위층 인맥을 만들며 투자은행 비즈니스 대부분을 골드만삭스로 끌어온다. 제너럴 일렉트릭의 상장도 그의 작품이다. 와인버그는 고객을 끌고 오고, 회사를 재건하는 데 성공하자 이제 포드 모터스를 상장시키겠다는 불가능한 도전에 나선다.
5. 1956: 포드 IPO – 불가능을 현실로
1956년 당시 포드는 미국 2위 자동차 제조사였다. 상장을 성공시킨다면 그 수수료는 천문학적이었다. 하지만 창립자인 헨리 포드는 월가를 증오했고, 유대인 혐오자로 유명했다. JP모건조차 그를 설득하는 데 실패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의 손자인 헨리 포드 2세는 와인버그에게 우호적이었다. 결국 골드만삭스는 포드 IPO의 주관사가 되는 데 성공한다. 월가 유대계 기업이 미국 최대 반유대주의 기업의 IPO를 맡게 된 것은 커다란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6. 1960~1980: 거스 레비와 트레이딩 시대의 시작
와인버그가 고객을 맡는 동안, 한 트레이더가 내부에서 새로운 수익원을 키워낸다. 그의 이름은 거스 레비. 그는 장외 대량주식거래(Block Trading)의 선구자였다. 큰 규모의 주식을 매도하면 시장에 충격을 줄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해, 레비는 투자자와 미리 가격을 협상해 할인된 가격에 매입한 후 시장에 점진적으로 매도해 차익을 남겼다. 이 시기에 시장은 비효율적이었고, 레버리지를 활용한 이러한 전략은 막대한 수익을 낼 수 있었다. 1960년대 말, 와인버그가 은퇴에 가까워지자 레비가 후계자가 된다. 이는 골드만삭스 역사상 최초로 '트레이더 출신'이 최고경영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레비는 회사를 트레이딩 중심 구조로 전환시키며, 큰 폭의 성장을 이끈다.
7. 1970~1980: 펜센트럴 스캔들과 골드만의 위기
하지만 트레이딩 규모가 커질수록, 골드만삭스는 더 큰 리스크에 노출되기 시작한다. 금융회사란 크기가 아무리 커도 단 하나의 실수로 무너질 수 있다. 골드만삭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1968년, 펜실베이니아 철도는 뉴욕 센트럴 철도를 인수하면서 미국 최대의 철도회사인 '펜센트럴'이 탄생한다. 하지만 이미 12억 달러에 달하는 부채를 안고 있었던 이 회사는 운영자금이 더 필요했다. 골드만삭스는 1억 달러 규모의 상업어음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해준다. 골드만삭스가 언더라이팅을 맡았고, 신용평가사도 높은 등급을 부여했기에 투자자들은 이 어음을 안전한 자산이라 믿고 기꺼이 매입했다. 하지만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펜센트럴은 파산한다. 철도 인프라는 낡아가고 있었고, 수익은 부채를 감당하지 못했다. 결국 상업어음을 보유한 투자자들은 큰 손실을 입게 된다. 이들은 골드만삭스를 상대로 '잘못된 정보를 제공했다'며 소송을 제기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신용평가사가 높은 등급을 부여한 이유는 바로 골드만삭스가 언더라이터였기 때문이었고, 골드만은 그 신용등급을 근거로 더 많은 부채를 밀어넣었던 것이다.
결국 법원은 골드만삭스가 투자자들에게 달러당 20센트를 보상하라고 판결한다. 사건은 시장에 경종을 울렸고, 골드만삭스는 수억 달러에 달하는 손해배상을 치러야 했다. 시장 환경이 악화되며 골드만삭스가 발행한 증권들에 문제가 생기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사태도 곧 닥칠 비극을 예고하지는 못했다.
#NARRATIVE
치열한 경쟁과 철저한 이기주의 속에서 단 한 회사가 100년이 넘도록 살아남았고, 그 결과 월가의 상징이 되었다. 사람들에게는 동시에 존경과 증오를 받는 회사이다. 그들의 문화는 분명 냉혹함을 기르는 구조다. 잊지 마라. 골드만이 승자가 되려면 누군가는 반드시 패자가 되어야 한다.
1. 1886~1914: 골드만삭스의 태동과 상업어음 비즈니스
1886년, 의류 사업으로 작은 성공을 거둔 유대인 이민자 마커스 골드만은 금융업에 발을 들인다. 그는 소규모 기업들이 매출채권을 빠르게 현금화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간파했다. 당시 은행 대출은 받기 어려웠고, 그는 이들 기업의 단기채권을 할인된 가격에 매입한 뒤 더 높은 가격에 다른 투자자나 은행에 재판매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단기 대출이 훗날 '상업어음'으로 불리게 된다. 이때가 바로 투자은행 산업의 태동기였다. 상업은행이 보수적이고 안전한 자금을 제공하는 것과 달리, Goldman Sachs 같은 회사는 더 위험한 자금을 제공했다. 그래서 '투자은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10년 후, 마커스 골드만은 연간 약 3천만 달러 규모의 상업어음을 거래하는 수준까지 사업을 키워낸다. 그가 60세가 되었을 때는 이미 평균 수명을 넘긴 상태였다. 은퇴 후에도 가업이 번창하도록 하기 위해 그는 사위 사무엘 삭스를 파트너로 영입한다. 1896년, 삭스는 회사의 자본금을 5명의 파트너에게 분배되는 160만 달러 수준까지 키워낸다. 하지만 상업어음 발행과 거래 시장은 빠르게 포화 상태에 이르고 있었다. 회사를 더 키우기 위해선 다음 성장 동력을 찾아야 했다.
2. 1897~1914: IPO 사업 진출과 리먼 브라더스와의 협업
19세기 말, 기업들은 상장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는 시대에 접어들고 있었다. 당신이 비상장 회사라면, 즉 친구 몇 명과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가 상장하고 싶어질 때, 일반적으로는 투자은행에 찾아간다. 투자은행은 발행과정을 설계하고, 언더라이팅을 해준다. 당시 IPO는 유럽계 명문 투자은행들이 주도하던 엘리트 비즈니스였다. 유대계였던 골드만삭스는 이 업계의 '아웃사이더'였지만, 이 파트너십은 IPO 비즈니스에 진출하기로 결심한다. 시작은 유대계 기업을 상장시키는 것.
1897년, Sears의 순자산은 25만 달러였지만 1905년에는 매출 3,700만 달러, 순이익 280만 달러를 기록하며 IPO 후보로 급부상한다. 하지만 시어스를 상장시키는 건 골드만삭스 단독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또 다른 유대계 신흥 투자은행인 리먼 브라더스와 손을 잡는다. 둘은 시어스의 보통주 3천만 달러, 우선주 1천만 달러 규모를 인수한다. 이 딜을 통해 두 회사는 전례 없는 수수료를 벌어들인다. 이후 다수의 기업들이 골드만삭스를 고객으로 삼게 되면서, 1914년에는 월가에서 유력한 투자은행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당시 시니어 파트너였던 헨리 골드만은 미 연방준비제도 설계자로 초청될 정도였다. 하지만 IPO는 경기순환형 비즈니스였다. 주식과 채권 발행으로 수백만 달러를 벌어들인 후, 골드만삭스는 이제 이 자금을 어떻게 재투자할지 고민하게 된다.
3. 1920~1929: 로어링 20스, 투자신탁 열풍, 그리고 대공황
마침내, 완벽한 타이밍이 온다. 1920년대 미국은 역사상 가장 강력한 강세장이 펼쳐지는 '로어링 20스' 시기였다. 사람들은 경제적 낙원이 도래했다고 믿었다. 은행 대출도 손쉽게 받을 수 있었고, 모두가 낙관에 휩싸였다. 골드만삭스는 이런 상황을 절호의 기회로 보고 본격적으로 투기 시장에 뛰어든다. 1백만 달러의 자본으로 'Trading Corporation'을 설립한 후, 이를 일반 대중에게 10배 가격에 판매하며 총 9,300만 달러를 조달한다. 이는 오늘날의 '스팩'과 매우 유사한 구조다. 본질적으로는 본인의 돈을 거의 쓰지 않고 시장에서 엄청난 자금을 모으는 방식이었다. 이후 투자신탁을 계속해서 만들어내고, 시장은 이 신탁을 사들이며 호황은 지속된다.
하지만 모든 호황은 끝나기 마련이다. 1929년 10월 29일. 역사상 최악의 금융 붕괴가 발생한다. 미국의 실업률이 폭증하고, 결혼률은 22% 하락, 자살률은 40% 상승한다. 골드만삭스의 트레이딩 코퍼레이션은 거의 전멸한다. 수억 달러가 증발했고, 파트너십은 1,300만 달러를 손실로 기록한다. 수백 개의 투자신탁이 파산하며 투자자들과 은행들을 끌어내린다. 그 와중에도 골드만삭스는 살아남는다. 고객들이 회사를 떠나지 않은 건 오직 한 남자 덕분이었다.
4.1930~1956: 시드니 와인버그, 바닥에서 정점으로
시드니 와인버그는 브루클린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11남매 중 셋째였다. 고등학교도 중퇴하고 가족을 부양해야 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그는 뛰어난 근면성과 인간관계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는 골드만삭스에서 청소부로 시작해 단 15년 만에 최고경영자 자리에까지 오른다. 정치인, CEO, 고위층 인맥을 만들며 투자은행 비즈니스 대부분을 골드만삭스로 끌어온다. 제너럴 일렉트릭의 상장도 그의 작품이다. 와인버그는 고객을 끌고 오고, 회사를 재건하는 데 성공하자 이제 포드 모터스를 상장시키겠다는 불가능한 도전에 나선다.
5. 1956: 포드 IPO – 불가능을 현실로
1956년 당시 포드는 미국 2위 자동차 제조사였다. 상장을 성공시킨다면 그 수수료는 천문학적이었다. 하지만 창립자인 헨리 포드는 월가를 증오했고, 유대인 혐오자로 유명했다. JP모건조차 그를 설득하는 데 실패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의 손자인 헨리 포드 2세는 와인버그에게 우호적이었다. 결국 골드만삭스는 포드 IPO의 주관사가 되는 데 성공한다. 월가 유대계 기업이 미국 최대 반유대주의 기업의 IPO를 맡게 된 것은 커다란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6. 1960~1980: 거스 레비와 트레이딩 시대의 시작
와인버그가 고객을 맡는 동안, 한 트레이더가 내부에서 새로운 수익원을 키워낸다. 그의 이름은 거스 레비. 그는 장외 대량주식거래(Block Trading)의 선구자였다. 큰 규모의 주식을 매도하면 시장에 충격을 줄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해, 레비는 투자자와 미리 가격을 협상해 할인된 가격에 매입한 후 시장에 점진적으로 매도해 차익을 남겼다. 이 시기에 시장은 비효율적이었고, 레버리지를 활용한 이러한 전략은 막대한 수익을 낼 수 있었다. 1960년대 말, 와인버그가 은퇴에 가까워지자 레비가 후계자가 된다. 이는 골드만삭스 역사상 최초로 '트레이더 출신'이 최고경영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레비는 회사를 트레이딩 중심 구조로 전환시키며, 큰 폭의 성장을 이끈다.
7. 1970~1980: 펜센트럴 스캔들과 골드만의 위기
하지만 트레이딩 규모가 커질수록, 골드만삭스는 더 큰 리스크에 노출되기 시작한다. 금융회사란 크기가 아무리 커도 단 하나의 실수로 무너질 수 있다. 골드만삭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1968년, 펜실베이니아 철도는 뉴욕 센트럴 철도를 인수하면서 미국 최대의 철도회사인 '펜센트럴'이 탄생한다. 하지만 이미 12억 달러에 달하는 부채를 안고 있었던 이 회사는 운영자금이 더 필요했다. 골드만삭스는 1억 달러 규모의 상업어음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해준다. 골드만삭스가 언더라이팅을 맡았고, 신용평가사도 높은 등급을 부여했기에 투자자들은 이 어음을 안전한 자산이라 믿고 기꺼이 매입했다. 하지만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펜센트럴은 파산한다. 철도 인프라는 낡아가고 있었고, 수익은 부채를 감당하지 못했다. 결국 상업어음을 보유한 투자자들은 큰 손실을 입게 된다. 이들은 골드만삭스를 상대로 '잘못된 정보를 제공했다'며 소송을 제기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신용평가사가 높은 등급을 부여한 이유는 바로 골드만삭스가 언더라이터였기 때문이었고, 골드만은 그 신용등급을 근거로 더 많은 부채를 밀어넣었던 것이다.
결국 법원은 골드만삭스가 투자자들에게 달러당 20센트를 보상하라고 판결한다. 사건은 시장에 경종을 울렸고, 골드만삭스는 수억 달러에 달하는 손해배상을 치러야 했다. 시장 환경이 악화되며 골드만삭스가 발행한 증권들에 문제가 생기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사태도 곧 닥칠 비극을 예고하지는 못했다.
#NARRA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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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warded from COINNESS News Feed (코인니스)
[트럼프 WLFI “팀·어드바이저 물량 초기 언락 없다…CEX 상장도 협의 중”]
트럼프 일가의 월드리버티파이낸셜(WLFI)이 WLFI 관련 커뮤니티 질의에 대해 “팀, 어드바이저, 공동 창업자 물량은 토큰 론칭 시 언락되지 않으며, 추가 프라이빗 세일도 없다. 초기 언락 대상은 퍼블릭 세일에서 0.015달러 또는 0.05달러에 매수된 일부 물량이며 나머지 토큰은 커뮤니티 투표를 통해 언락 일정이 결정될 예정이다. 또 우리는 주요 중앙화거래소(CEX)와의 지속적인 협의도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앞서 코인니스는 WLFI 양도 안건이 통과됐다고 전한 바 있다.
https://coinness.com/news/1133821
트럼프 일가의 월드리버티파이낸셜(WLFI)이 WLFI 관련 커뮤니티 질의에 대해 “팀, 어드바이저, 공동 창업자 물량은 토큰 론칭 시 언락되지 않으며, 추가 프라이빗 세일도 없다. 초기 언락 대상은 퍼블릭 세일에서 0.015달러 또는 0.05달러에 매수된 일부 물량이며 나머지 토큰은 커뮤니티 투표를 통해 언락 일정이 결정될 예정이다. 또 우리는 주요 중앙화거래소(CEX)와의 지속적인 협의도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앞서 코인니스는 WLFI 양도 안건이 통과됐다고 전한 바 있다.
https://coinness.com/news/1133821
Coinness
트럼프 WLFI “팀·어드바이저 물량 초기 언락 없다…CEX 상장도 협의 중” - 코인니스
트럼프 일가의 월드리버티파이낸셜(WLFI)이 WLFI 관련 커뮤니티 질의에 대해 “팀, 어드바이저, 공동 창업자 물량은 토큰 ...
Forwarded from Zoomer News
TRUMP BACKED WORLD LIBERTY TO IMPOSE NEW VESTING SCHEDULE ON PUBLIC SALE BUYERS, DESPITE PREVIOUSLY STATING THEY WOULD BE FULLY UNLOCKED: X
🔗 velo.xy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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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warded from Narrative Wars
(2/2) "Goldman Sachs" 그들은 어떻게 역사적으로 세계를 지배해왔는가?
8.1976: 거스 레비 사망과 새로운 리더십
겉보기엔 막강해 보였던 거스 레비도 스트레스를 이겨내지 못했다. 출장 중 뇌졸중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회사 전체가 충격에 빠진다. 후임 계획조차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곧 모두가 존경하던 단 한 명의 인물을 떠올렸다. 바로 존 화이트헤드였다.
9.1976~1983: 존 화이트헤드와 윤리강령의 시대
하버드 출신에 제2차 세계대전 중 해군사령관이기도 했던 화이트헤드는 D-Day 작전에 참여한 베테랑이었다. 그는 직감했다. "이제 골드만삭스는 다른 방식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그는 회사를 군대처럼 운영해야 한다고 믿었다. 모두가 동일한 윤리 기준과 행동강령에 따라 움직여야 했다. 그는 어느 일요일 노트에 '우리가 우리 직원들에게 기대하는 행동'을 메모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훗날 골드만삭스의 '14가지 비즈니스 원칙''으로 이어진다. 그중 핵심은 다음과 같았다: "고객의 이익이 최우선이다."
화이트헤드는 고객의 이익을 중심에 둔 업무 표준화를 추진했고, 이를 철저히 이행했다. 그리고 그는 직원들에게 가르쳤다. "언젠가 당신은 억만장자 고객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는 당신을 로비에서 몇 시간이고 기다리게 만들 수도 있다.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화이트헤드의 리더십은 단순히 골드만삭스를 수익성 있는 회사로 만든 것이 아니라, 고객들로부터 다시 신뢰를 회복하게 했다.
10. 2000~2006: 모기지 붐과 골드만의 본격적인 베팅
2000년대 초반, 미국 주택 시장은 전례 없는 호황을 맞는다. 모든 미국인이 '내 집 마련'의 꿈을 쫓으며 주택을 사들이고, 월가의 투자은행들은 이 꿈을 '상품화'하기 시작한다.
그 중심에 있던 것이 바로 '모기지 담보부 증권''이다. 골드만삭스도 이 거대한 흐름에 올라탄다. 단순히 중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본으로 대규모 포지션을 취하며 공격적으로 수익을 노렸다. 2005년부터 2년 동안, 골드만은 2,030억 달러 규모의 MBS를 인수한다.
당시 CEO였던 행크 폴슨은 이러한 성과를 정점으로, 재무장관으로 백악관에 입성한다.
그 뒤를 이은 인물은 로이드 블랭크파인. 그는 트레이더 출신답게, 더욱 공격적인 수익 추구 전략을 펼친다. 골드만삭스는 이제 거의 '헤지펀드에 가까운' 회사로 변모해 있었다.
자기 자본으로 수십억 달러의 자산을 운용하며, 클라이언트보다 자기 거래가 중심이 되는 구조였다. 고객 중심 철학은 점점 흐려졌고, 시장은 호황을 구가하며 이런 변화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었다.
11. 2007~2008: 서브프라임 위기와 골드만의 생존 전략
2007년, 미국 서브프라임(저신용자 대상) 대출 시장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연체율이 치솟고, 수많은 모기지 회사들이 줄도산한다.
골드만삭스는 누구보다도 빠르게 위기를 감지했다. 2006년 말, 내부적으로 이미 모기지 시장에 이상 신호가 감지되었고, 곧장 포지션을 축소하고 일부 자산에 대해서는 반대로 '베팅'하기 시작한다.
즉, 자신들이 만들어 고객에게 팔았던 금융 상품(MBS)에 대해, 동시에 '이건 무너질 것이다'라는 전제로 베팅(숏)을 건 것이다. 이 베팅은 'CDS'라는 파생상품을 활용했다.
이중적인 거래는 시장에서 거센 비난을 받았지만, 골드만의 논리는 단순했다.
“클라이언트가 원하면 상품을 만들어주는 것일 뿐이다. 그 거래에 대해 회사의 트레이딩 부서가 따로 판단을 내리는 것은 별개다.”
결국, 2008년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하고 세계 금융시장이 붕괴되는 가운데, 골드만삭스는 CDS 베팅 덕분에 막대한 손실을 피하거나 오히려 이익을 거둔다.
물론, 회사의 평판은 바닥까지 떨어졌고, '고객에게 쓰레기를 팔고 동시에 그에 베팅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12. 2008~2009: 버핏의 투자와 은행 전환
위기 속에서 골드만삭스는 마지막 카드를 꺼낸다. 바로 워런 버핏이다.
2008년 9월, 버핏은 골드만삭스에 50억 달러를 투자한다. 시장은 이를 '신뢰의 표시'로 받아들이며 안도한다.
같은 시기, 골드만은 상업은행으로의 전환을 선언하며 연준의 보호망 아래 들어간다. 이는 더 강력한 규제를 의미했지만, 동시에 생존을 의미했다.
13. 2010~: 리테일 시장으로의 확장과 본질의 유지
금융위기 이후 골드만삭스는 오랜 시간 동안 명성 회복에 애를 쓴다. 그리고 새로운 성장동력을 리테일, 즉 일반 소비자 금융에서 찾는다.
2020년대, 로빈후드 같은 앱이 무료 주식 거래를 제공하면서 리테일 투자자들이 시장을 주도하기 시작하자, 골드만도 변화에 나선다. “우리도 대중을 위한 자산관리 서비스를 제공하겠다.”
그들은 '마커스'라는 브랜드를 통해 대중금융에 진출하고, 디지털 자산관리 서비스로 확장한다.
하지만 본질은 여전하다. 기회가 있다면 누구보다 빠르고 정교하게 움직인다. '위기에서 회피하고, 호황은 누구보다 먼저 올라탄다. 이게 살아남는 자의 법칙이고 우리가 최고가 된 이유다'
#NARRATIVE
8.1976: 거스 레비 사망과 새로운 리더십
겉보기엔 막강해 보였던 거스 레비도 스트레스를 이겨내지 못했다. 출장 중 뇌졸중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회사 전체가 충격에 빠진다. 후임 계획조차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곧 모두가 존경하던 단 한 명의 인물을 떠올렸다. 바로 존 화이트헤드였다.
9.1976~1983: 존 화이트헤드와 윤리강령의 시대
하버드 출신에 제2차 세계대전 중 해군사령관이기도 했던 화이트헤드는 D-Day 작전에 참여한 베테랑이었다. 그는 직감했다. "이제 골드만삭스는 다른 방식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그는 회사를 군대처럼 운영해야 한다고 믿었다. 모두가 동일한 윤리 기준과 행동강령에 따라 움직여야 했다. 그는 어느 일요일 노트에 '우리가 우리 직원들에게 기대하는 행동'을 메모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훗날 골드만삭스의 '14가지 비즈니스 원칙''으로 이어진다. 그중 핵심은 다음과 같았다: "고객의 이익이 최우선이다."
화이트헤드는 고객의 이익을 중심에 둔 업무 표준화를 추진했고, 이를 철저히 이행했다. 그리고 그는 직원들에게 가르쳤다. "언젠가 당신은 억만장자 고객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는 당신을 로비에서 몇 시간이고 기다리게 만들 수도 있다.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화이트헤드의 리더십은 단순히 골드만삭스를 수익성 있는 회사로 만든 것이 아니라, 고객들로부터 다시 신뢰를 회복하게 했다.
10. 2000~2006: 모기지 붐과 골드만의 본격적인 베팅
2000년대 초반, 미국 주택 시장은 전례 없는 호황을 맞는다. 모든 미국인이 '내 집 마련'의 꿈을 쫓으며 주택을 사들이고, 월가의 투자은행들은 이 꿈을 '상품화'하기 시작한다.
그 중심에 있던 것이 바로 '모기지 담보부 증권''이다. 골드만삭스도 이 거대한 흐름에 올라탄다. 단순히 중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본으로 대규모 포지션을 취하며 공격적으로 수익을 노렸다. 2005년부터 2년 동안, 골드만은 2,030억 달러 규모의 MBS를 인수한다.
당시 CEO였던 행크 폴슨은 이러한 성과를 정점으로, 재무장관으로 백악관에 입성한다.
그 뒤를 이은 인물은 로이드 블랭크파인. 그는 트레이더 출신답게, 더욱 공격적인 수익 추구 전략을 펼친다. 골드만삭스는 이제 거의 '헤지펀드에 가까운' 회사로 변모해 있었다.
자기 자본으로 수십억 달러의 자산을 운용하며, 클라이언트보다 자기 거래가 중심이 되는 구조였다. 고객 중심 철학은 점점 흐려졌고, 시장은 호황을 구가하며 이런 변화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었다.
11. 2007~2008: 서브프라임 위기와 골드만의 생존 전략
2007년, 미국 서브프라임(저신용자 대상) 대출 시장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연체율이 치솟고, 수많은 모기지 회사들이 줄도산한다.
골드만삭스는 누구보다도 빠르게 위기를 감지했다. 2006년 말, 내부적으로 이미 모기지 시장에 이상 신호가 감지되었고, 곧장 포지션을 축소하고 일부 자산에 대해서는 반대로 '베팅'하기 시작한다.
즉, 자신들이 만들어 고객에게 팔았던 금융 상품(MBS)에 대해, 동시에 '이건 무너질 것이다'라는 전제로 베팅(숏)을 건 것이다. 이 베팅은 'CDS'라는 파생상품을 활용했다.
이중적인 거래는 시장에서 거센 비난을 받았지만, 골드만의 논리는 단순했다.
“클라이언트가 원하면 상품을 만들어주는 것일 뿐이다. 그 거래에 대해 회사의 트레이딩 부서가 따로 판단을 내리는 것은 별개다.”
결국, 2008년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하고 세계 금융시장이 붕괴되는 가운데, 골드만삭스는 CDS 베팅 덕분에 막대한 손실을 피하거나 오히려 이익을 거둔다.
물론, 회사의 평판은 바닥까지 떨어졌고, '고객에게 쓰레기를 팔고 동시에 그에 베팅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12. 2008~2009: 버핏의 투자와 은행 전환
위기 속에서 골드만삭스는 마지막 카드를 꺼낸다. 바로 워런 버핏이다.
2008년 9월, 버핏은 골드만삭스에 50억 달러를 투자한다. 시장은 이를 '신뢰의 표시'로 받아들이며 안도한다.
같은 시기, 골드만은 상업은행으로의 전환을 선언하며 연준의 보호망 아래 들어간다. 이는 더 강력한 규제를 의미했지만, 동시에 생존을 의미했다.
13. 2010~: 리테일 시장으로의 확장과 본질의 유지
금융위기 이후 골드만삭스는 오랜 시간 동안 명성 회복에 애를 쓴다. 그리고 새로운 성장동력을 리테일, 즉 일반 소비자 금융에서 찾는다.
2020년대, 로빈후드 같은 앱이 무료 주식 거래를 제공하면서 리테일 투자자들이 시장을 주도하기 시작하자, 골드만도 변화에 나선다. “우리도 대중을 위한 자산관리 서비스를 제공하겠다.”
그들은 '마커스'라는 브랜드를 통해 대중금융에 진출하고, 디지털 자산관리 서비스로 확장한다.
하지만 본질은 여전하다. 기회가 있다면 누구보다 빠르고 정교하게 움직인다. '위기에서 회피하고, 호황은 누구보다 먼저 올라탄다. 이게 살아남는 자의 법칙이고 우리가 최고가 된 이유다'
#NARRA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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